수련회 예배1 - "상한 심령"
3.1절 수련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 viewsNotes
Transcript
Transformation 1
Transformation 1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0. “괜찮아요”
0. “괜찮아요”
요즘 청년, 청소년들에게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
바로 “괜찮아요”라는 말입니다.
"요즘 어때?" "괜찮아요."
"힘든 일은 없고?" "네, 괜찮아요."
"기도 제목 있어?" "아뇨, 딱히 없어요. 다 괜찮아요."
“정말 좋아졌어요.”
정말 괜찮습니까? [3초]
저는 상담을 하면서 마음이 아플때가 많아요.
청년, 청소년들을 지켜볼때도 마음이 아플때가 많아요.
어떨 때는 좀 화가 나기까지도 합니다.
분명 안 괜찮거든요.
얼굴은 그늘져 있습니다.
삶은 헝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더 두려운 건 뭔지 아십니까?
청년들 스스로 정말 괜찮다고 믿는 것 같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아픈데요.
그렇게 상처가 많은데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모습을 '가짜 평안'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가장된 평안입니다. 포장된 평화입니다.
1. 깨어진 관계 - 영적인 바로미터
1. 깨어진 관계 - 영적인 바로미터
자기는 괜찮다는데,
왜 자꾸 그렇게 걱정하냐고 묻기도 합니다.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영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단순한,
그러나 확실한 지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십시오.
그 관계가 점점 회복되어 가는가?
아니면 점점 깨어져 가는가? 점검해 보시면 됩니다.
인간관계가 왜 깨어집니까?
모든 관계의 파괴는 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관계만 깨어진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졌어요. 죄의 수치를 알게 된 것이죠.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서로 원망하고 탓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거죠.
자연과 세상과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이런 관계의 파괴는 죄와 함께 우리에게 대물림 되었습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또 파괴된 관계는 죄를 짓게 합니다.
죄가 어떤식으로 관계를 파괴합니까?
죄는 인간 삶 속에서 가치를 왜곡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습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에요. 사람이에요.
그런데, 죄로 물든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업, 성취, 업적을 우선 하도록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치의 왜곡이
직접적인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는 거에요.
깨어진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려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것보다 급한게 많아요. 중요한게 많아요.
점점 관계의 회복에 드는 수고를 낭비로 여기게 됩니다.
관계에서의 수고와 노력도 가볍게 여겨요.
그러다 보면 정말로 관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인간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과로 일어나요.
그러므로, 여러분 주변의 관계가 깨어지고 있다면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아픔들이 바로 그들의 ‘깨어진 관계’에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깨어진 관계’들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 저를 멈춰서게 만들어요.
부르짖고 아파하며,
기도하는 대부분의 지점이 바로 거기에요.
‘깨어진 관계’
2. 아픔을 피하는 이유
2. 아픔을 피하는 이유
저는 수없이 깨어지는 관계들을 봅니다. 신자들 주변에서요.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 상대방 탓인가요?
주어진 환경 탓인가요? 물려 받거나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것인가요?
이유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너무 복잡해서 해결의 실마리도 안보여요.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그게 아니에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병명은 ‘심각해지지 못하는 병’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신음하는 신자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씨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을 찾는 자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요.
여기 계신 분들은 제외하고요.
여러분이 주님을 간절히 찾으니까
이 귀한 시간에 여기 모여있는 것 아닙니까?
다들 쿨하게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산뜻한 얼굴로 사람들을 만납니다.
도대체 다들 어디서 그 아픔들을 털어내고 오는 겁니까?
해결된게 아니에요. 마음만 털어낸 겁니다.
덮은 겁니다. 가린 겁니다. 잘라내 버린 겁니다.
왜 우리는 상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으려 할까요?
왜 우리는 아픈 마음을 좀더 품고 기도하지 못할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고통이 지속될까 두려워요.
막상 내 본 모습을 직면하면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요.
스스로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겁니다.
약해 보이기 싫어하는 마음도 있어요.
상처받고 아픈 사람으로 보이기 싫은 거에요.
믿음이 약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은 마음도 있습니다.
"나 힘들어, 어려워"라고 말하면,
"쟤는 맨날 문제야", “나아지질 않네” “답이 없네” 이런 말 들을까봐 싫어요.
그래서 우리는 도망칩니다.
그렇게 자기를 보호하는 겁니다.
깨어진 관계 앞에서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봅시다.
친구와 다퉜습니다. 관계가 깨졌습니다.
마음이 편한게 정상인가요? 불편해야 정상인가요?
불편해야 정상입니다.
배우자와 다퉜습니다. 관계가 상하거나 깨졌습니다.
마음이 즐거운게 정상인가요? 불편해야 정상인가요?
불편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은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덮어둡니다. 도망칩니다.
해결 방법이 잘 안보이니까요.
그리고 다른 대체제를 찾는거에요.
맛있는 걸 먹습니다. 유튜브를 켜서 웃긴 영상을 봅니다.
여행을 떠납니다. 열심히 자기계발에 몰두합니다. 운동을 미친 듯이 합니다.
직장에 가서 일에 열중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법니다.
나랑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나를 지지해 주는 다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잠깐은 잊혀지지요.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착각합니다. "아, 좀 나아졌다. 좀 괜찮아졌네"
하지만 여러분. 그게 나아진 게 아니 잖아요.
마취제를 맞는 겁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진통제를 계속 먹는거에요.
그리고 "나 안 아파, 나 괜찮아"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태도는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놔두고 누리는 평안.
그것은 거짓 평안입니다.
3. 관계의 회복 없이 평안은 없다.
3. 관계의 회복 없이 평안은 없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깨어진 관계 앞에서 아파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부터 참된 회복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애써 다른 즐거움을 찾지 마세요.
다른 위로를 애써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값싼 기쁨들에 섣불리 손을 뻗지 마세요.
가짜 평안으로 상처를 덮으려 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 드리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관계의 대상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다면 슬퍼해야 합니다. 관계가 깨졌다면 슬퍼해야 합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잠이 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정말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대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의 관계는 산산조각이 났는데,
나는 넷플릭스 보면서 낄낄거리고 있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얻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관계 자체를 하찮게 여기는 꼴입니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깨어진 관계를 방치하고 드리는 예배,
형제와 화목 없이 구하는 평안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네가 형제와의 관계를 깨뜨려 놓고, 나에게 와서 거룩한 척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그 가짜 평안을 준 적이 없다."
요한일서 말씀도 무섭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깨어진 관계들을 뒤로 하고, 덮어 두지는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혹시 거짓말쟁이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체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는 엉망으로 둔 채,
수련회 가서 두 손들고 눈물흘린다고 진짜 평안이 찾아옵니까? 아닙니다.
관계 회복을 위한 애통함이 필요합니다.
관계의 회복 없이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샬롬이 없습니다.
샬롬은 감정적 평안이 아닙니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샬롬은 관계적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복을 만드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감정이 아닙니다.
회개는 ‘죄송해요’라는 사과 한 마디가 아닙니다.
회개는 ‘깨어진 관계들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가짜 평안’은 관계를 피합니다.
사람을 피합니다.
하나님도 피합니다.
그러면서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덮습니다.
그런데요. 진짜 회개는 달라요
회개는 도망치지 않아요.
하나님께로 돌아가요.
사람에게로 돌아가요.
가정으로 돌아가요.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상한 심령”
4. “상한 심령”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거짓 평안을 깨고 샬롬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충신이었던 우리야를 사지로 몰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자신의 육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요.
다윗에 의해 한 가정이 무참히 짓밟혔어요. 실로 엄청난 죄를 지은거에요.
그런데, 다윗은 가짜 평안 속에 머물러 있었어요.
밧새바와 다윗이 동침한 그 날 바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리고, 나단이 다윗을 책망할 때는 이미 아이가 태어나 있었어요.
그러니까, 범죄를 저지른 후 적어도 10개월 동안을
마치 아무일 없던 사람처럼 지냈다는 거에요.
속은 썩어 가고, 영혼은 병들었는데요.
“괜찮아요. 저 요즘 잘 지내요.”, “별일이요? 별일 없는데요?”
다윗 같은 사람도 스스로 마취시키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픈 상처를 덮어두고 넘어가려는 것처럼 그도 그랬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어요.
그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했어요. 감사하게도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어요.
사무엘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 사함을 받았어요. 하지만, 거기서 다 끝난게 아니에요.
죄의 책임은 면했지만, 죄로 인한 결과들은 그대로 다윗에게 돌아옵니다.
나단은 네 가지 심판을 예언을 했어요.
1. 다윗의 집에서 칼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
2. 다윗은 아내들을 다른 사람에게 때앗길 것
3. 다윗이 은밀히 행한 일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날 것
4.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이는 죽을 것
다윗이 죄 위에 쌓았던 가짜 평안이 산산조각 납니다.
제일 먼저 아이가 앓기 시작합니다.
밧세바를 통해 낳은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는 거에요. 자신의 죄 때문에요.
여러분, 이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전처럼 또 도망칩니까?
오늘 본문 사무엘하 12:16 을 봅시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다윗은 금식했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습니다.
하루가 아니었습니다. 이레 동안, 7일 동안 그랬습니다. 식음을 전폐했어요.
신하들이 와서 말렸습니다. "왕이시여, 이러다 몸 상하십니다. 식사 좀 하세요."
다윗은 거절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아파했습니다.
왜 다윗이 이토록 엎드렸습니까? 단순히 아이가 아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죽어감과 병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달은 거죠.
그 동안 덮어 두었던, 깨닫지도 못했던 죄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어요.
자신의 죄가 파괴한 우리아의 가정. 빼앗은 남의 아내.
이렇게 파괴된 관계 속에서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가 생명을 잃게 된것이에요.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죄를 직면했습니다. 죄의 결과를 직면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자신의 추악한 모습, 깨어져 버린 사람들과의 관계.
그 고통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상한 심령'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상한 심령은 우울해 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감정 과잉이 되어서 맨날 울고 다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난 원래 이래, 답이 없어. 난 안 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학하라는 게 아닙니다.
상한 심령은 '영적 정직함'입니다.
"하나님, 제가 망가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소중한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이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가짜 위로로 덮지 않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으로, 사람들의 칭찬이나, 노력으로 얻는 성취로 내 상처를 덮지 않는거에요.
찢어진 상처를 그대로 들고 하나님 앞에 주저앉아 있는 것.
그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다윗은 그 시간을 가졌습니다.
회개는 클릭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계의 회복은 자판기처럼 버튼 누르면 뚝딱 나오는 게 아닙니다.
다윗처럼 가짜 평안을 끝내야 합니다. 다윗처럼 '엎드려 기다리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 또한 회개는 마음 속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는 반드시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하 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은 후에 다윗은 무엇을 합니까?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복된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 앞으로 돌악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돌아갑니다.
사무엘하 12:21–23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신하들과 영적인 대화를 합니다. 공동체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유를 설명합니다.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끊어졌던 소통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경험한 은혜와 경험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사무엘하 12: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합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관계를 다시 세우는 갈림길이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새롭게 책임지는 자리에 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다윗과 밧세바에게
솔로몬이라는 새로운 소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가짜 평안’과 ‘상한 마음’의 차이 입니다.
진짜 회개는, 관계의 회복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
5.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
아마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목사님, 너무 우울합니다.”
“저는 힘이 없어요.”
“저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저는 지금도 괴로워서 못할 것 같아요."
맞습니다. 아픕니다. 내 죄를 보는 건 끔찍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직면하는 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있는 거에요.
우리가 왜 상한 심령을 가질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세상은 약한 모습을 멸시합니다.
"멘탈이 약하네", "찌질하네"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저 아파요. 저 망가졌어요"라고 고백하면요. 주님은 여러분을 절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 네가 이제야 진짜 너의 모습으로 내 앞에 왔구나."
"내가 그 마음을 기다렸다."
상한 심령은 자격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내가 깨어져야, 주님이 나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내가 무너져야, 주님이 나를 다시 세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상함이 진짜 치유의 시작입니다.
“직면하라.”
“직면하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괜찮은 척"은 그만 하십시오. 가면을 벗으십시오.
세상이 주는 값싼 위로, 가짜 평안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마취시키지 마십시오.
해결되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까?
마음에 찔림이 있는 죄가 있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덮어두지 마십시오.
여행으로, 쇼핑으로, 바쁜 스케줄로 도망치지 마십시오.
아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그리고 그 상한 마음을 그대로 들고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다윗처럼 머리를 땅에 대고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주님이 싸매 주실 때까지.
상한 마음은 회복을 향한 가장 강력한 영적 자세입니다.
오늘 이 밤, 하나님은 여러분의 화려한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의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우리 시간, 정직하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 괜찮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 마음이 상했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오는 이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